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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호일

등록일 2024-09-09 작성자 관리자 조회 61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꽃을 한 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연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작약꽃을 한아름 실은 자전거다. 한옥마을 그윽한 골목길을 열대여섯 살 소년이 꽃 사려 외치며 간다. 봄이 깊을 무렵이겠고, 시간은 아침상 치우고 한숨 돌린 오전쯤이 어떨까. 이쯤으로도 족히 상쾌하지만, 여기서 그치면 미당이 아니다. 악센트가 두 군데 더 있다. 뒤에서 창을 열고 불러도 못 알아듣고 그냥 열심히 외치고만 가는 장면이 그 하나. 말할 수 없이 생기로운 향기가 난다. 또 하나는, 골목 끝 언덕 위에서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는 대목. 옥빛의 봄 공기를 그 방울 소리는 얼마나 영롱하게 쟁그랑쟁그랑 울리는가. 소년 역시 고달픈 가운데서도 씩씩할 것이다.  

김사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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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와집 처마들이 잇대인 서울 북촌 골목길에서 벌어진 일이겠다! 소년이 작약 꽃다발을 자전거 뒤에다 한 아름 싣고 꽃 사려 꽃 사려 외치며 지나간다. 골목에 퍼지는 소년 목소리는 어린 닭처럼 앳되나 그 기상은 구김살 없이 늠름하다. 소년은 어쩌자고 부르는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리는 걸까. 하늘은 옥색이고 햇빛이 화창하니, 방울소리는 얼마나 명랑하게 공중에 파문을 지으며 퍼져나가겠는가! 그까짓 작약꽃 한 다발 들여놓지 못한다고 무슨 대수이랴! 바라건대, 우리의 나날이 작약꽃을 들일 만큼만 여유가 있는 그런 호일(好日)이면 딱 좋겠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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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여섯 살의 꽃이 이제 막 핀 꽃을 팔러 다닌다. 하마터면 자기까지를 사겠다고 덤비는 이도 있겠다. 나 같으면 그러고 싶을 게다. 꽃에 반해서 자기 신명 속을 가는 소년이여. 나의, 우리들의 영영 잃어버린 고향이여. 꽃을 팔아 이문을 남겨 돈을 벌게 생겼는가. 꽃에 반해 그저 싱글벙글 한시라도 행복하겠는가. 막 목청 트인 목소리로 꽃을 사라고는 외치나 그것은 호객일 수 없고 그저 그러한 가사의 신명 들린 노래였으니 그 소리에 반해서 창호지 창문 열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표정도 꽃빛이었을 터. 실지로 이 소년은 꽃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양의 어느 골목의 풍경을 넉넉히 하기 위한 것이 제 일인 듯하다. 꽃 앞자리에 냉큼 앉아 내닫는 꽃 소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속이여. 나랑 자리를 바꿀까나. 먹기와집 위의 옥색 공기, 그 사이의 백색 창호문, 그리고 작약꽃의 그 진보라 내지 유백색의 꽃잎들, 이만한 색채면 저 색(色)의 마술사라는 앙리 마티스의 붓만 빌리면 되지 않겠나. 호일(好日)은 호일이다!  

장석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