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guk University
* 해설사실 문의 전화 : 063-564-8058(오전 11시, 오후 3시 두 차례 현장 답사)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는 뒷간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알뫼라는 마을에서 시집와서 아무껏도 없는 홀어미가 되어 버린 알묏댁은 보름사리 그뜩한 바닷물 우에 보름달이 뜰 무렵이면 행실이 궂어져서 서방질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그네에게서 외면을 하고 지냈습니다만, 하늘에 달이 없는 그믐께에는 사정은 그와 아주 딴판이 되었습니다.
음 스무날 무렵부터 다음 달 열흘까지 그네가 만든 개피떡 광주리를 안고 마을을 돌며 팔러 다닐 때에는 “떡 맛하고 떡 맵시사 역시 알묏집네를 당할 사람이 없지.” 모두 다 흡족해서, 기름기로 번즈레한 그네 눈망울과 머리털과 손끝을 보며 찬양하였습니다.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축이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열녀 할머니도 그건 그랬었습니다.
달 좋은 보름 동안은 외면당했다가도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은 또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었지요.
앞니가 분명히 한 개 빠져서까지 그네는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을 떡 장사를 다녔는데, 그동안엔 어떻게나 이빨을 희게 잘 닦는 것인지, 앞니 한 개 없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달 좋은 보름 동안의 연애의 소문은 여전히 마을에 파다하였습니다.
방 한 개 부엌 한 개의 그네 집을 마을 사람들은 속속들이 다 잘 알지만, 별다른 연장도 없었던 것인데, 무슨 딴손이 있어서 그 개피떡은 누구 눈에나 들도록 그리도 이뿌게 만든 것인지, 빠진 이빨 사이를 사내들이 못 볼 정도로 그 이빨들은 그렇게도 이뿌게 했던 것인지, 머리털이나 눈은 또 어떻게 늘 그렇게 깨끗하게 번즈레하게 이뿌게 해낸 것인지 참 묘한 일이었습니다.
이 땅 우의 장소에 따라, 이 하늘 속 시간에 따라, 정들었던 여자나 남자를 떼내 버리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습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 질마재 마을에서는 뜨끈뜨끈하게 매운 말피를 그런 둘 사이에 쫘악 검붉고 비리게 뿌려서 영영 정떨어져 버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모시밭 골 감나뭇집 설막동이네 과부 어머니는 마흔에도 눈썹에서 쌍긋한 제물향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깝이란 별명의 사잇서방을 두고 전답 마지기나 좋이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문에 인줄을 늘이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 놓았습니다.
그래 아닌 게 아니라, 밤에 등불 켜 들고 여기를 또 찾아들던 놈팽이는 금방에 정이 새파랗게 질려서 “동네방네 사람들 다 들어 보소…… 이부자리 속에서 정들었다고 예편네들 함부로 믿을까 무섭네……” 한바탕 왜장치고는 아조 떨어져 나가 버렸다니 말씀입지요.
이 말피 이것은 물론 저 신라적 김유신이가 천관녀 앞에 타고 가던 제 말의 목을 잘라 뿌려 정떨어지게 했던 그 말피의 효력 그대로여서, 이조를 거쳐 일정 초기까지 온 것입니다마는 어떨갑쇼? 요새의 그 시시껄렁한 여러 가지 이별의 방법들보단야 그래도 이게 훨씬 찐하기도 하고 좋지 않을깝쇼?
간통사건이 질마재 마을에 생기는 일은 물론 꿈에 떡 얻어먹기같이 드물었지만 이것이 어쩌다가 주마담走馬痰 터지듯이 터지는 날은 먼저 하늘은 아파야만 하였습니다. 한정 없는 땡삐 떼에 쏘이는 것처럼 하늘은 웨—하니 쏘여 몸써리가 나야만 했던 건 사실입니다.
“누구네 마누라허고 누구네 남정네허고 붙었다네!” 소문만 나는 날은 맨 먼저 동네 나팔이란 나팔은 있는 대로 다 나와서 “뚜왈랄랄 뚜왈랄랄” 막 불어자치고, 꽹과리도, 징도, 소고도, 북도 모조리 그대로 가만 있진 못하고 퉁기쳐 나와 법석을 떨고, 남녀노소, 심지어는 강아지 닭들까지 풍겨져 나와 외치고 달리고, 하늘도 아플밖에는 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픈 하늘을 데불고 가축 오양깐으로 가서 가축용의 여물을 날라 마을의 우물들에 모조리 뿌려 메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어느 것도 길어 마시지 못하고, 산골에 들판에 따로따로 생수 구먹을 찾아서 갈증을 달래어 마실 물을 대어 갔습니다.
‘눈들 영감 마른 명태 자시듯’이란 말이 또 질마재 마을에 있는데요. 참, 용해요. 그 딴딴히 마른 뼈다귀가 억센 명태를 어떻게 그렇게는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쬐끔도 안 남기고 목구먹 속으로 모조리 다 우물거려 넘기시는지, 우아랫니 하나도 없는 여든 살짜리 늙은 할아버지가 정말 참 용해요. 하루 몇십 리씩의 지게 소금장수인 이 집 손자가 꿈속의 어쩌다가의 떡처럼 한 마리씩 사다 주는 거니까 맛도 무척 좋을 테지만, 그 사나운 뼈다귀들을 다 어떻게 속에다 따 담는지 그건 용해요.
이것도 아마 이 하늘 밑에서는 거의 없는 일일 테니 불가불 할 수 없이 신화의 일종이겠습죠? 그래서 그런지 아닌 게 아니라 이 영감의 머리에는 꼭 귀신의 것 같은 낡디낡은 탕건이 하나 얹히어 있었습니다. 똥구녁께는 얼마나 많이 말라 째져 있었는지, 들여다보질 못해서 거까지는 모르지만……
소자小者 이 생원네 무우밭은요.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났었는데요. 그건 이 소자 이 생원네 집 식구들 가운데서도 이 집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이 아주 센 때문이라고 모두들 말했습니다.
옛날에 신라 적에 지도로대왕은 연장이 너무 커서 짝이 없다가 겨울 늙은 나무 밑에 장고만 한 똥을 눈 색시를 만나서 같이 살았는데, 여기 이 마누라님의 오줌 속에도 장고만큼 무우밭까지 고무시키는 무슨 그런 신바람도 있었는지 모르지. 마을의 아이들이 길을 빨리 가려고 이 댁 무우밭을 밟아 질러가다가 이 댁 마누라님한테 들키는 때는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아이들도 할 수 없이 알게 되었습니다. “네 이 놈 게 있거라. 저놈을 사타구니에 집어넣고 더운 오줌을 대가리에다 몽땅 깔기어 놀라!” 그러면 아이들은 꿩 새끼들같이 풍기어 달아나면서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더울까를 똑똑히 잘 알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 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1932년 여름 논에 뜸부기 소리 좋을 때,
나는 큰 고리짝에 그득히 책을 사 담아 싣고
식구들이 사는 고창 읍외 월곡리의
대숲 속 내 초당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라도 돌아온 것만이 대견하셔서
꾸지람 한마디 없이,
무척 반가우면 하는 버릇으로,
오른손 끝을 약간 떨며 나를 맞이하셨네.
그러고는 내가 짐 지워 온 것들이 문학책이라는 걸 아시자
자기가 두고 보시던 『고문진보』 상하권을 가져다주며
“이것도 읽어 내야 한다” 하시었네.
하여 나는 슬픈 솥작새 우는 여러 밤을 지내면서
너무나 불효한 걸 뉘우친 나머지
내가 깃든 이 초당 이름을 ‘노초산방魯草山房’이라 하기로 하고
한지에 서툰 먹글씨로 그걸 횡서로 써서
방으로 드나드는 출입문 위에 붙여 놓았네.
공자가 태어난 곳이 노나라고
내 아버지는 공자의 철저한 유생이었으니까요.
내 아버지 이얘기가 나왔으니
이분 일도 누룽지만큼은 여기 잠깐 적어 놓아야겠군.
그는 이조 말에 낙향한 한 정3품 통정대부의 증손자로
어려서는 총명하여 열세 살 때 향시鄕試에 장원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술과 도박으로 패가하고 세상을 뜨자
그 빚 때문에 열다섯 살에 관가에 끌려가
주리 틀린 한쪽 팔은
일생 동안 제대로는 쓰지를 못했었네.
열일곱 살 때 편모를 모신 한문의 총각 선생님이 되어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포란 데로 와서 장가는 들었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이조 최말기의 군청 측량기사가 되었는데,
고창군 안의 땅을 재고 다니다가
이 나라의 제일 지주 김기중 영감 형제의 전답을 잰 게 인연이 되어
급료가 좀 나은 김기중 영감의 사랑방 서생이 되었던 중
이 댁이 서울로 이사하자 그 농감農監 중의 하나로만 처져 남았나니,
이 덕택으로 우리 식구도 좀 여유 있게 살 만큼은 되었으나
나는 이게 챙피해서 그만두라고 아버지를 졸라
내가 고창고보에 편입학을 했을 때는
아버지는 그 농감 자리도 그만두어 버렸었네.
각설하고,
1932년 여름부터 그 이듬해 초가을까지
나는 이 고창 월곡리의 대밭 속 초당에서
밤에는 솥작새, 부흥이, 올빼미,
낮에는 뻐꾸기, 꾀꼬리, 까치 울음을 데불고
주로 일역본의 소설과 시만 읽고 지냈는데,
레오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샤를르 보들레르, 일인日人 호리구찌 다이가쿠 번역의
프랑스 시선 『월하月下의 일군一群』,
일본 시인 이시가와 다쿠보쿠, 키타하라 하쿠슈,
조선 시인 주요한,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은
이때 내게는 오랜 가뭄 끝의 단비만 같았네.
고리짝에 사 온 책이 다 동나자
고창고보 때 은사의 서재 것들을 빌려 날랐고,
또 일본의 출판사에 주문도 했었지.
아 이때 읽은 것 중엔 니체의 그 숨찬 『짜라투스트라』도 있었군.
아랫마을에서 폐병을 앓던 최기업이란 청년이
빌려 준 『시문학』 창간호에서 본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시의 우리 말맛은
내 가슴의 공명선을 울려서
내게 이웃 고을 부안의 신석정을 찾아가게도 했었지.
고구마 밭에서 일하다가 나를 맞이한
그 장한壯漢 신석정의 활짝 핀 미소와
그날 밤 그와 함께 먹은 그 단 석류의 맛과
그 달밤에 같이 보던 월견초 꽃밭이
아직도 눈에 삼삼 선히 보이네.
우리 마을 진영이 아재 쟁기질 솜씬
이쁜 계집애 배 먹어 가듯
이쁜 계집애 배 먹어 가듯
안개 헤치듯, 장갓길 가듯.
샛별 동곳 밑 구레나룻은
싸리밭마냥으로 싸리밭마냥으로,
앞마당 뒷마당 두루 쓰시는
아주먼네 손끝에 싸리비마냥으로.
수박꽃 피어 수박 때 되면
소수리바람 위 원두막같이,
숭어가 자라서 숭어 때 되면
숭어 뛰노는 강물과 같이,
당산나무 밑 놓는 꼬누는,
늙은이 젊은애 다 훈수 대어
어깨너머 기우뚱 놓는 꼬누는
낱낱이 뚜렷이 칠성판 같더니.
“아미산월가라
아미산월이반륜추하니
영입평강강수류를……”
일고여덟 살 또래의 우리 서당 패거리들이
여름 달밤 그 마당의 모깃불 가를 돌며
요렇게 병아리 소리로 당음을 합창해 읊조리는 것은
고것은 전연 고 의미 쪽이 아니라
순전히 고 뜻 모를 소리들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이턴, 모깃불의 신바람에,
달밤에 우리 소리를 울려 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이뿐 눈썹’ 같은 거니 뭐니
고런 생각일랑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 쓰게 되면 아버지는 나를 업어다가 산과 바다와 들녘과 마을로 통하는 외진 네 갈림길에 놓인 널찍한 바위 우에다 얹어 버려 두었습니다. 빨가벗은 내 등때기에다간 복숭아 푸른 잎을 밥풀로 짓이겨 붙여 놓고, “꼼짝 말고 가만히 엎드렸어. 움직이다가 복사잎이 떨어지는 때는 너는 영 낫지 못하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그 눈을 깜짝깜짝 몇천 번쯤 깜짝거릴 동안쯤 나는 그 뜨겁고도 오슬오슬 추운 바위와 하늘 사이에 다붙어 엎드려서 우아랫니를 이어 맞부딪치며 들들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게 뜸할 때쯤 되어 아버지는 다시 나타나서 홑이불에 나를 둘둘 말아 업어 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스란히 성하게 산 아이가 되었습니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