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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

등록일 2025-01-02 작성자 관리자 조회 447

 

동천冬天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1968) 수록

 

아름다운 사랑이다. 그 사랑을 천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는다는 발상은 비현실적이어서 더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동지섣달에 나는 매서운 새조차 그걸 알고 비껴가겠는가. 먹으로 그린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한국적 아름다움을 가장 완벽하게 형상화한 시라는 이야기도 있다.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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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다섯 행으로 된 이 시는 우리 시문학사가 탐구한 정신의 한 정점이다. 이 시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되어 있다. 겨울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그 곁을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이다. 시인은 이 그림에 이야기를 붙인다.

즉 시인은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고운 눈썹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밤마다 그 님의 모습을 그린다. 그러는 과정에서 님의 고운 눈썹은 사랑의 마음으로 정화되고, 나아가 상징이 된다. 그것을 하늘에다 옮겨놓은 것이 곧 겨울 하늘의 초승달이다. 그것은 너무나 지극하고 또 소중하고 또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매서운 새도 흉내를 내어보면서 비끼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범할 수 없는 경지, 매서운 새까지도 시늉하며 비끼어 갈 수밖에 없는 경지, 그런 정신의 경지가 미당이 「동천」에서 보여주는 경지이다.

이남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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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을 지났거나 절정에서 조금 비껴 난 감정은 뜨거울 수가 없다. 뜨겁기만 할 수가 없다. 이리저리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감정이 될 수도 없다. 절정을 지나면서 비껴 난 감정은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이면서 어지러웠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온다. 더 정확히는 온갖 우여곡절을 지나면서 혼탁해진 감정을 씻고서야 도달할 수 있는 지경. 그것이 재의 감정이라면, 거기에 동반되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아니 당연하게도 맑다. 이때의 맑음은 처음부터 거저 주어진 맑음이 아니다. “즈믄 밤의 꿈으로” 힘겹게 씻겨 내는 시간을 통과하고서야 가까스로 주어지는 맑음이다. 

김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