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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 한국 역사여

등록일 2026-01-12 작성자 관리자 조회 36

 

역사여 한국 역사여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흙 속에 파묻힌 이조 백자 빛깔의
새벽 두 시 흙 속의 이조 백자 빛깔의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새벽 비가 개이어 아침 해가 뜨거든
가야금 소리로 걸어 나와서
춘향이 걸음으로 걸어 나와서
전라도 석류꽃이라도 한번 돼 봐라.

시집을 가든지, 안상객安上客을 가든지
해 뜨건 꽃가마나 한번 타 봐라.
내 이제는 차라리 네 혼행 뒤를 따르는
한 마리 나무 기러기나 되려 하노니.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외씨버선 신고
다홍치마 입고 나와서
울타릿가 석류꽃이라도 한번 돼 봐라.

-서정주문학전집(1972) 수록

 

첫 연만으로도 이 시는 어떤 완결감을 전한다. 그러면서 고통스럽도록 강렬한 공감을 자아내어 절실하고 숙연한 감회의 바닥 모를 심연에로 끌려 들어간다. 이에 나타난 슬픔과 체념과 다시 그 후의 축원 등은 깊은 침잠으로 내려앉았다가 아리고 아프게 떠오르기를 거듭하는 그 율조임을 넉넉히 짐작게 한다.

“새벽 두 시 흙 속의 이조 백자 빛깔”이라는 한 구절만 들더라도 하루의 가장 적멸寂滅한 심야의 시간에 홀로 불면의 베개를 돋우고 생각에 잠기는 이가 비로소 알고 느끼는 그 “이조 백자 빛깔”이다. 진지한 사변思辨의 부피를 만나 보게 한다. 그만치 내포가 크다는 말이 된다.

이 작품은 쓸쓸하다. ‘한국의 역사’를 바라볼 때, 혹은 노래하려 할 때 결코 면할 수 없는 만감의 쓸쓸함, 어쩌면 구극究極에까지 이를 쓸쓸함을 한국인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간직하는 비애롭고 숙연한 조국 인식이리라.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이는 단순히 말이나 글이 아니고 커다랗게 나붙은 게시판에 주물을 파서 새긴 각문刻文이다. 형벌처럼 들쑤셔지는 아픔과 단심丹心의 조국 사랑을 이 작품에서 읽어 냄으로써 감동과 압도감을 금할 수 없다. 미당 선생의 명시가 허다하거니와 이 작품은 정녕코 한국인 모두의 심정이 동참하게 될 노래임을 확신한다.

김남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