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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1

등록일 2026-02-02 작성자 관리자 조회 9

 

   기도 1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하눌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던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던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던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서정주시선(1956) 수록

 

황야를 헤매던 봉두난발의 리어왕이 잠깐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쯤 입 속으로 중얼거렸을 법한 시. ‘기도’란 삶의 어느 막다른 자리에서 인간이 취하는 마음의 몸짓. 일말의 간절함이 있고야 성립한다.

‘텅 비인’이 아니라 ‘텡 비인’이라 애써 적고 있다. ‘텅’이 비어 있음의 표준화된 단순 의태어라면 ‘텡’에는 빈 공간을 돌아 울리고 나오는 바람 소리의 허전한 여운이 있다. ‘텡’에는 텅 빔 앞에 선 사람이 느끼는 허탈이, 그 심정의 기척까지가 묻어 있다. 그래서 ‘텡 비인’에서는 저 빈 항아리, 빈 들녘을 돌아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한데 스스로를 ‘텡 비인 항아리’, ‘텡 비인 들녘’ 같다고 느끼는 시 속의 처지나 상태는 어떤 것일까. 운명에 떠밀려 난파한 화자가 마침내 아상과 집착들을 모두 앗긴 채, 하눌이여 마음대로 합소서. 이제 제겐 아무것도 없나이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나이다. 맘대로 합소서. 그 투명해진 탄식이 손에 잡힐 듯하다.

김사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