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시문학관
Dongguk University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마재 신화』(1975)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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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는 미당의 시행처럼 나 자신과 세상이 ‘아조 할 수 없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다 떨어진 저녁에 도리 없이 미당의 시를 읽으며 살아간다. 미당의 어떤 시를 마누라에게 읽어 주면 그 시는 마누라의 바가지를 단 며칠 동안이라도 잠재우는 현실적 신통력도 있다.
언어에 매달리기를 젖먹이처럼 하는 나는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비치다’라는 단어에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었다. 때거울 툇마루에 외할머니와 손자의 얼굴이 비치고, 똥오줌을 담은 소망통 속에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비친다. 아마도 그 ‘비침’은 역사성 또는 영원성이 인간의 삶과 의식 속에 투영됨으로써 현실 속의 인간으로 하여금 낙원을 끝끝내 상실치 않게 해주는 어떤 신화적 작용이 아닐까.
질마재는 미당 개인이 포착해 낸 공동체의 신화일 것이다. 그 공동체는 질마재일 뿐 아니라 한국이다. 나는 그 시들이 개인이 형상화해 낸 공동 창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