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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등록일 2026-07-13 작성자 관리자 조회 332

 

  바다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불만 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海心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 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 떠라. 사랑하는 눈을 떠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화사집(1941) 수록

 

미당의 「바다」에서 읽어 낸 일차적 의미는 처절한 절망감이다. 바로 그 절망에 상응하는 강렬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그때 나의 몽매의 어둠을 섬광처럼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 그 섬광은 곧 나에게 하나의 준열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너는 네 시의 그 캄캄한 막힘에 대해 스스로 “침몰하라!”고 세 번씩이나 연거푸 소리칠 수 있을 만큼 진짜로 처절하게 절망하고 있는가?

수중에 없었던 『화사집』을 찾는다고 찾았지만 주변에는 가진 사람이 없었다. 거기 수록되었던 시들은 그것이 낱편으로 소개되어 있는 여기저기를 뒤져서 거의 전부 읽었다. 내가 40년대의 문학소년 시절에 『화사집』을 웬만큼 이해할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뒤늦게 60년대 중반에 ‘화사학교’에 입학해서 오늘 현재까지 25년 이상이나 졸업을 못하고 꾸물대고 있는 늙은 유급생인 것이다.

이형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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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처음 읽은 것은 막 사춘기로 접어들 무렵으로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큰 소리로 낭독을 하곤 하였다. 전후戰後의 암담한 현실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뺏고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삶은 곤핍하고 가난하였으며 전쟁 후유증을 심히 앓고 있는 예민한 젊은이들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는 현실 인식! 마음은 먼 곳에 두고 누더기 같은 현실을 감수하여야만 하는 삶은 어쩌면 치욕이기도 하였다. 「바다」는 이런 처지에 방황하던 나에게 정화의 길을 열어 준 작품이었다. 반쪽의 낮달처럼 창백하고 미완성인 젊은이의 가이없는 슬픔을 위무하고 어디다 풀 수 없었던 분노를 삭이게 해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시를 큰 소리로 읽을 적마다 눈물로 「바다」를 읽던 젊은 날의 아픔이 가만히 가슴에 치밀곤 한다.

허영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