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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필 무렵

등록일 2024-09-09 작성자 관리자 조회 67

백일홍 필 무렵

백일홍 필 무렵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 나마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로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폭염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주춧돌이 녹아내릴 듯하다. 환심장(換心腸, 환장의 본딧말), 마음과 내장이 다 뒤집힐 듯 미치겠는 더위다. 염천의 더위도 견디기 힘든데 굶주림까지 겹쳤다. 보름 남짓 배 속에 들인 건 허기뿐이라 소담하게 피어난 백일홍꽃들이 밥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서운 반전이 이어진다. 백일홍의 개화는 추궁秋窮을 건너려면 아직 백일이 남았다는 암시일 테니.

 

쉼 없이 반복되는 가혹한 운명의 드잡이에 삶이 맥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미당은 ‘녹다’라는 동사로 감각화한다. ‘굶다’가 현실의 반영태라면 구름을 수식하는 ‘되다’는 유계幽界의 상징일 터. ‘녹아서-되어서’의 반복 구조 속 “밥상 받은 아이”의 웃음으로 표현한 백일홍꽃은 이 시의 백미다. 시행의 배치를 포석에 비유하자면 활로가 막혀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돌[完生]이다. 생의 아이러니를 환기하는 대가의 묘수가 아닐 수 없다.  

휘민 시인·미당연구소 전임연구원